영화 ‘사진의 얼굴’의 주인공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숨비 제공
다음 달이면 구순을 맞는 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열정적으로 기록해온 일본인이다.
1964년 일본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뒤 100여 차례 한국을 찾으며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대부터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청계천 변, 동두천 미군 기지촌과 베트남전 파병 등 한국 현대사의 현장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렇게 쌓인 10만 컷 속 한국인의 얼굴과 구와바라의 끈질긴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얼굴’(고희영 감독)이 2일 개봉한다. 개봉을 앞두고 내한한 구와바라를 지난달 26일 서울 중구 한 회의실에서 만났다. 그는 “요즘 한국의 발전 상황은 어떤 부분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주제를 잡기도 힘들 정도”라며 눈부신 변화에 대한 감회를 말했다.
영화 ‘사진의 얼굴’에 담긴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 ‘무언의 데모’. 숨비 제공
농업대학을 나온 뒤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구와바라가 포토저널리스트로 일본사회에 이름을 알린 건 1962년 미나마타병으로 신음하는 구마모토현 미나마타 사람들을 기록해 세상에 알리면서다. 이후 그의 카메라는 북한과 베트남, 캄보디아, 구소련 등으로 뻗어 나갔지만 그 가운데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곳은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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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때 한국에서 온 친구를 처음 만났어요. 친구에게 들은 한국전쟁 이야기와 그가 부르는 ‘아리랑’, ‘도라지’ 노래를 들으며 언젠가 한국에 가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그는 처음 김포공항에 내려서 ‘지프’를 개조한 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올 때 모래 먼지 날리던 길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영화 ‘사진의 얼굴’에 담긴 구와바라 시세이의 1960년대 청계천 변 사진. 숨비 제공
취재 의뢰를 받아 서울과 부산 도심, 판문.과 비무장 지대, 거문도 등 섬과 농촌의 풍경과 사람들을 찍던 그의 카메라는 한국사의 예민한 부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화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무언의 데모’(1965)를 찍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 현장이 대표적이다. 빗속에서 무거운 표정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학생들을 정면에서 잡은 흑백 사진에는 당시의 비장했던 공기까지 담겼다. 하지만 그가 기록하기 원했던 모습들은 한국 정부가 드러내기 싫어하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기도 했다. “외신기자들은 한국 언론에 비해 자유로운 편이었는데도 취재가 수월하지는 않았어요. 필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시위대와 함께 도망 다니기도 하고, 몰래 카메라에 재빨리 빈 필름을 갈아 끼우는 등 나름의 작전을 쓰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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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에게 다가갈 때 일본인 사진가라는 건 또 하나의 장벽이 됐다. “‘쪽바리’, ‘개새끼’ 라는 말도 많이 들었죠. 번듯한 풍경보다 달동네나 기지촌 같은 곳들을 주로 찍다 보니 더 거부감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와 친했던 한국 기자마저도“ “일본 가서 공개할 텐데 굳이 한국의 가난한 모습을 찍느냐”고 핀잔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는 “좋은 사진을 많이 남겨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가 고향처럼 애착을 가졌던 청계천 변 풍경이 대표적으로 멀리서 보면 낡고 허름한 판자촌이지만 그곳을 빼곡히 채운 사람들의 생명력 넘치는 얼굴에서 구와바라의 각별한 애정이 읽힌다.
10만 컷이 쌓였지만 1980년 광주는 그에게 안타까운 구멍이다. “한일협정 반대 취재로 입국 금지를 당했다가 72년 풀려서 문경과 이천의 도자기 마을 취재에 빠져있을 때였어요.” 그가 일 년 내내 비우다시피 한 일본 집에서 생계를 꾸리며 아이들을 키우던 한국인 아내 최화자씨는 뉴스 보도를 보고 부랴부랴 남편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구와바라가 산속을 빠져나와 광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시가 폐쇄된 상태여서 두고두고 후회를 남겼다. 두번째 아쉬움은 그의 마지막 꿈과도 겹친다. 그는 “남한뿐 아니라 북한도 일곱 차례 취재하면서 남북한이 통일된 모습을 내 손으로 기록하는 데 내 마지막 꿈인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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